긴 청바지에 까만색 코트 그리고 부끄러운 듯 흰 마스크로 가린 얼굴.
나도 까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널 만나러 갔지.
서로 얼굴 쳐다보기도 부끄러워 서로 밥만 깨작댔고,
내 소매를 잡고서 나를 끌고 버스를 타고,
가는 길 은근슬쩍 나에게 기대어 수줍게 걸어갔어.
한 줌 낙엽들도 날아가 버렸으니,
이젠 날려 보내야지.
우리 사이가 점점 굳어져 간다고 생각할 때쯤, 넌 아마 무뎌지고 있다고 생각했나 봐.
그런 시간이 스치는 와중에,
네가 묻더라.
"나 소개받을까?"
난 네가 무슨 의도로 그걸 나에게 묻는지 알지 못했어.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알게 되었지. 왜냐면 넌 지난번에도 나에게
"나랑 너랑 무슨 사이야?"
라고 물었으니까 말이야. 유추하는 데는 내가 눈치가 없어서 시간이 필요했어.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우리가 엇갈렸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지나간 추억에 대해 아쉬워하는 마음은 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내뱉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 켠이 아린 건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도 내가 널 존중한답시고, '내가 좋아해도 네가 좋다면야.'라는 생각으로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했었잖아. 네가 날 떠볼 심산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난 아마 네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거야. 그냥 그랬을 거야. 그건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어쩔 수가 없던 거지.
처음 널 봤을 때, 일부러 어색해하지 않으려고 했던 행동들이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곤 했지. 필요 없는 말, 더는 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내뱉으며 빈 곳들을 우리의 흔적으로 채워 넣으려 했지. 마음이 급하고 부끄러워 내가 발버둥 쳤던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가끔 어색한 농담 대신 재밌는 장난도 치면서 우린 걸었지.
네가 내 코트 소매를 잡으며 날 이끌 때의 그 뒷모습은 정말 잊을 수가 없어.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정말 어디로든 가고 싶었지. 가는 곳이 버스 정류장이었지만 말이야. 지역이 달라 내 사투리를 쑥스러워하던 모습은 또 어떻고. 난 모든 게 예뻐 보였어. 그저 너와 함께 있고 내 옆에 있다는 사실마저, 그 사실마저 아름답다고 생각했지.
가기 싫다는 널 억지로 끌고 어떤 전망대를 올라갔어. 네가 투정을 부리며
"걷기 싫어, 욱아."
하는 걸 듣는데 난 왜 그게 귀여워 보였는지 모르겠다. 넌 정말 가기 싫었을 텐데. 풉. 생각해보니, 널 누나라고 불렀던 예전이 그립기도 했어. 그때도,
"누나 조금만 더 가면 돼. 얼른 가자."
라며 널 누나라고 불렀지. 내 주변에 누나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좀 특별하게 다가왔어. 그 날은 결국 전망대를 올라가서 멀리 보이는 것들을 추억했지. 네가 걷는 걸 싫어했어도 내가 끌고 가면 또 즐거운 얼굴을 하고선 구경을 하더라. 그 모습을 봤는데 내가 어떻게 네 옷자락을 잡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마, 너의 그 미소를 보면 어떤 남자라도 네 소매를 잡고 싶지 않을까?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손목 위 걸쳐진 옷자락에 내 손을 살포시 얹힐거야.
강아지를 안고 있는 널 봤어. 머리가 길어서 네가 안고 있는 강아지에게까지 닿더라. 강아지가 부러웠던 건 처음이었어. 네 향기는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아. 나 원래 향 좋아하잖아. 너에게도 분명 좋은 향이 났을 거야. 아, 아니다. 네가 좋아서 향이 좋았을 거야.
그때는 널 보며 사진을 많이 찍었어. 널 많이 담았어. 나를 찍어준다 했어도 거절을 많이 하던 나였지. 그 날, 처음 날 찍었을 때 그게 잘 나와서 프로필 사진에 올리고 막 그랬었잖아. 나중에 프로필 사진이 바뀌니까, 네가 그렇게 바꿀 사진이 없었냐고 날 타박하던 게 생각이 나.
시간이 흘러, 내가 너에게 내 마음에 대해 고백했잖아. 너는 친한 친구 같다며 나를 밀어냈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널 그리고 있었어. 그래도 다시 한번이라는 생각에 해볼 것들은 다 해봤어. 후회는 남기지 않겠다고 내 이기심을 불태웠어. 네 마음의 방향은 무시하려고 했어. 시간이 지나, 여전히 아쉬운 건 사랑은 둘이 하는 것이라는 걸 내가 간과했다는 거야. 네가 아쉽진 않아. 넌 항상 나에게 최고였으니까. 미련도 없어. 후회도 없는데, 그래도 너에 대한 조그마한 그리움이라도 남아있으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아름다웠던 시절들 다 지나가고 서로의 옷깃만 스쳤던 그때를 추억해보는 시간을 가졌어. 적을 것들은 많았지만 내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넣어봤어. 너에게 보내는 편지도 아니고 나에게 보내는 편지도 아냐. 그저 어디론가 날려버릴 편지지. 기회가 된다면 너에게 정말 아름다운 시를 선물해주고 싶었어. 네 덕분에 쓴 것도 많지만, 너 때문에 쓴 것만은 아니니까. 난 그 시를 볼 때 널 생각하지 않거든.
네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나면 난 널 무척이나 안고 싶을 거야.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 그래서 그냥 날려 보내려고. 그리움만 담아 고이 접어 어디론가 날려 보내려고. 그냥 많이 사랑했던 추억을 적으며 가슴 따듯한 것만 느껴도 되니까.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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