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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

[단편] 파도, 불꽃놀이 그리고 장마

by 도묵 2020.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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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물일 때 만나,

밀물일 때 헤어져 이런 것일까.

 

[아무도 없는 방 안, 쇠창살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소나기가 생각났다. 왜 우리는 그렇게 길지 못했을까. 조금만 더 길어져 지루해져도 좋았을 것을.]

[네가 가끔만이라도 나에게 와도 좋았을 것을.]

 

썰물일 때 만나, 깊었던 밀물이 되었다.

네가 이제 그만 놀자 하며 해변으로 나와 고운 모래를 손아귀에 한 움큼 쥐었을 때, 나는 그 사이로 흐르는 반짝거림을 보았다. 모래였을까. 그 날 우리는 폭죽을 몇 개 사와 하늘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얘기했다.

네가 무엇이길래 이리 덧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생각하던 중 네가 말했다.

"폭죽이 터지면 그 자리에 연기가 생겨."

"그렇지."

"우리도 그렇게 되겠지. 폭죽처럼 터졌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겠지?"

"아냐, 우리는 태양이나 별처럼 오래갈 거야."

나는 깊은 순수함으로 널 바라보며 얘기했다. 영원 따위 없다는 것을 알았어도 너와의 관계에서만큼은 영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니까. 없는 것을 있다고 얘기할 만큼 네가 좋으니까.

"별도 곧 사라질 거야. 우리는 오로지 지금 이 별을 보고 있는 것일 테니까."

너도 나와 같길 바라며 뱉었던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 혼자 땅에 떨어진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원한 건 없다고 말하려던 너였다. 찰나의 순간 빛나는 별들은 내일 다른 자리에, 다른 시간에 있을 테니.

그 말이 아파도 나는 영원처럼 사랑하자며 너에게 손을 건넸다. 우리는 다르다며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들이라며, 운명이라는 말들을 모래사장에 남겨둔 채 우리는 그 날 사랑을 나눴다.

 

[비는 좀처럼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 머릿속도 마찬가지로 네 생각이 그치질 않는다. 도대체 네가 무얼 남기고 간 것이기에 소나기처럼 왔던 너인데 늦여름 장마 같을까. 혹여 우리 다시 장마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비는 공기를 차갑게 데우며 알지 못하는 곳들을 질퍽하게 만든다. 다시 고개를 젓고 혼잣말로 '훠이 훠이' 내뱉으며 안주를 씹는다.]

 

파도에 떠 있는 거품처럼 무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그저 의미 없는 공기방울들만 남아있다. 형체도 알 수 없고 얼마나, 어디에 생겼는지도 모르는 것들에 의해 우리는 점점 떠밀려 갔다. 한참을 파도에 떠다니다 낯선 해변가에 도착했을 때 너는 없었다. 우리가 그때 영원과 순간에 대해 얘기했던 그곳에 있는 것인지는 몰랐다. 다시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네가 움켜쥐었던 것처럼 조금은 까끌한 모래를 나의 다섯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힘껏 쥐었다.

흘러내리는 모래알들. 너는 그 날 나와 함께 있으면서 흘러내리는 것들을 보았을까. 한껏 움켜쥐어도 흘러내리는 것들을.

나의 기억 속엔 아직 같은 별을 바라보고 끝없이 항해할 수 있을 것만 같던, 바다 같던 네 눈망울이 선명한데 말이다. 난 너를 찾아 다시 파도에 뛰어들겠지만 그 날 우리가 보았던 별들과 나만이 볼 수 있었던 네 옆모습 볼 수 없겠지.

 

[질겅거리는 오징어를 입에 넣으며, 지난 연애들을 되돌아본다. 길고 짧았던 관계들과 나를 떠나간 많은 사람들 뒤에 남은 것은 끝이 없는 장마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내리는 비는 끝이 없어 보였다. 혹은 끝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마치 순교자처럼, 고통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다 안다. 비가 내린 뒤에는 날이 개고 따뜻한 햇살이 맞이해준다는 것. 하지만 그때 너와 영원을 얘기했던 순간처럼 지금 이 순간만큼은 비가 그치지 않을 것만 같고 영원한 장마가 이어질 것만 같다.

나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오징어를 입에 욱여넣는다. 쇠창살 너머 이제 들리지 않는 빗소리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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