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어느 날, 날 키워주었던 아저씨가 나에게 물었다.
"얘야, 넌 내가 널 떠나면 어떨 것 같니?"
"슬플 것 같아요."
아저씨와 깊은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일찍이 연고도 없는 날 거두고 키워준 아저씨. 고아원에서 누군가 내 손을 처음으로 잡아주었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굳은살이 박인 손, 눈가의 주름으로 나에게 낯익음보다는 낯섦을 주었던 당신. 하지만, 손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따듯했다. 세상 처음으로 태양보다 따듯한 손을 잡았던 때였다. 엄마가 죽은 당시, 어릴 적부터 아빠에게 버림받고 누군가에게 내 손을 잡혀본 적이 없었다. 그때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저씨는 항상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고, 가끔은 툴툴대며 장난도 거는 나에게는 가장 친근한 사람이었기에,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런 대화는 가보지 못한 나라에 혼자 떨어진 것마냥 매우 낯설었다.
"내가 널 두고 아줌마한테 가면 어떨 것 같아?"
"싫어요.."
"그런데 평소에는 왜 그런 얘기를 안 했니?"
"그냥요.."
"내가 널 떠날까 봐 너무 싫어서 그랬던 거야?"
"..."
"얘야, 난 널 떠나지 않는단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렴."
"그치만.. 자꾸만 걱정이 되는걸요."
"그럴 때는 나에게 말해주렴. 그럼 그때마다 내가 그 걱정을 없애주는 주문을 걸어줄게."
"어떻게요..?"
"글쎄다. 그건 네가 나에게 그럴 때 말을 해줘야 나도 해줄 거란다. 그러니 마음껏 내게 터놓으렴."
"알겠어요... 근데 정말 아저씨마저 날 떠나면 전 정말 이제 남자들 못 믿을 것 같아요... 지겨워요, 이제."
"하하하. 모든 남자들이 다 널 아프게 만들고 지나치진 않는단다. 아저씨를 보렴. 아저씨는 네 옆에 계속 있어주었잖니."
아저씨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마치 내가 말하는 것이 거짓인 것마냥 나에게 짓궂게 굴었다.
"그래도 앞으로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딨어요... 갑자기 훌쩍 아줌마 따라 떠날 수도 있는 거고..."
"아니야. 아저씨는 아줌마보다 네가 더 소중해. 네가 웃는 모습이 아줌마가 웃는 모습보다 더 예쁘단다. 아저씨는 너의 웃음을 오래도록 보고 싶구나."
"거짓말..."
거짓말 같았다. 매번 나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들도 나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떠났다. 지나고 보면 그들이 내 이해의 폭을 넓혀주긴 했지만 그 폭이 넓어졌다는 건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았다는 뜻으로 내 안에 남게 되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도 사실인걸."
"못 믿겠어요. 증명해줘요."
"음... 그러면 이렇게 하자꾸나. 우리 매일 보는 거야."
"네?"
"내일 볼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잠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서 매일 보는 거야. 어떠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똘망똘망한 눈으로 난 아저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곧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눈망울로 말이다. 눈물이 흐를까, 속내를 들킬까 겁이 났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항상 오늘 보는 거야. 오늘 널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늘 널 집에 데리고 오고 말이야."
"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저씨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미래를 보장해주나요?"
"아니지. 하지만, 매일 있을 현재는 보장해주잖니? 우리 매일 보다 보면 매일 함께 하는 거야. 매일을 함께 하다 보면 이 아저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의 매일을 너로 채울 수 있지 않겠니? 우리 아가도 말이야."
아저씨는 처음부터 거의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항상 '아가, 아가~' 했다.
"...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난 내일이 걱정되는데..."
"내일도 곧 오늘이 된단다."
아저씨는 지긋한 눈빛으로 저무는 햇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죠... 만약 아저씨가 저를 떠난다면 저도 아저씨처럼 나쁜 사람이 될 거예요. 그땐 말리지 마세요. 어차피 말릴 아저씨도 없겠지만..."
"그러렴. 괜찮단다. 그래도 괜찮아. 남들이 아무리 너의 행동에 대해 뭐라고 해도 이 아저씨는 아가를 항상 사랑한단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나쁘게 굴어도요..? 저랑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상처를 받을 텐데... 그게 뭐예요."
다른 사람들이 날 욕하고 나쁘게 대하면, 나도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한 번은 고아원에서 남자아이 하나가 내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 얼굴을 할퀸 적이 있었다. 난 크게 울음을 터뜨렸고, 두 주먹을 불끈 쥘 만큼 분노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해주었다. 얼굴을 할퀴었고, 그 아이가 아끼던 장난감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사실 그보다 더 하긴 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당하고는 못 살았고 화가 많았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아예 무시하거나 그들이 했던 짓보다 더한 짓들을 해주거나 내가 해야 직성이 풀렸다. 미워하려다 싶으면 그 감정이 싫어 화로 미움을 억눌렀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 날 바로잡아주거나 넘어질 때 지탱해준 적이 없었다. 그나마 지탱하고 있던 나뭇가지도 어느 순간 지렛대가 되어 나를 멀리 보내버렸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했던 행동들을 나도 똑같이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내가 지탱하고 있는 존재를 넘어서 나에게 큰 고목 같은 존재였기에,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항상 아저씨한테 가서 속속들이 말했다. 학교 친구들에게 욕을 퍼붓고 시비 거는 남자아이를 팼어도 아저씨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아, 그럴 수 있지라는 말만 연신 했었다. 한 번은 그래서 내가 엇나가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아저씨는 나의 화도 다 받아주었고, 나의 울음도 받아주었다.
첫 연애가 끝이 나고 아픔만 남았을 때, 울음 섞인 말투로 남자 친구 욕을 할 때도 아저씨는 묵묵히 옆에서 할 말 다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러고 나선 다 잘 될 거라며 나를 토닥여주었다. 두 번째 연애 때는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워서 나도 같이 피웠다고 말했더니 그건 그것대로 경험이라고 말해주었다. 세 번째 연애에서, 남자 친구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싫어해서 그만 피우라는 의미로 걔 앞에서 담배를 물어뜯어서 차였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고 싶었나 보구나 라며 그냥 들어주었다.
아저씨도 내가 이해가 안 됐을 거다. 아이를 처음 키워보는 돌싱에, 반듯하게 자란 티가 나는 아저씨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내가 이상해 보였을 거다. 그래도 항상 나를 이해해보려 눈썹을 치켜세우던 고마운 아저씨였다.
"괜찮아. 언젠가 또 아가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거란다. 그땐 그런 상처가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게 아물 거란다. 햇빛에 비치는 네 흉터를 따듯한 어둠으로 가려줄 수 있는 사람이 올 거야."
"아저씨 말은 가끔 너무 어려워요..."
아저씨는 가끔 내가 알 수 없는 말들로 나를 감싸주었다. 늘 그랬듯 내일도 그럴 것처럼 날 대해주어서 난 내일이 무서웠다.
"살다 보면 너에게 남겨진 흉터들을 보기 싫을 때가 있을 거야. 그럴 때 네게 흉터를 따듯하게 가려줄 수 있는 사람은 올 거란다. 그리고 아가야, 넌 생각보다 강해."
"제가요..?"
가시로 가득한 내가, 고아원에서부터 기울 수 없는 상처가 내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내가 강하다는 말이 새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냥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미워하려고 삐뚠 길들을 걸어왔을 뿐이었다. 난 항상 애쓴 것 밖에 없었다.
"그래, 넌 네가 살아가는 길을 긍정할 힘이 있단다. 네 길을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한 마음을 지녔어."
아저씨는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난 생각보다 약한데. 무너질 때 잘 무너지고, 일어나는 것도 버거워한 적이 많은데.
"아저씨는 솔직함의 힘을 믿어. 넌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말한대도, 그래도 내 길은 옳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아이란다. 정해진 길이란 없어. 정해진 것만 보고 따라가다 놓치는 것들이 꽤나 많단다? 아가, 넌 네가 하고 싶은 걸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잖니. 이참에 물어보자꾸나. 넌 무얼 하고 싶니 아가?"
"전... 예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저와 같이 예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렇구나. 우리 아가는 행복해지고 싶구나. 그러려면 아가도 행복한 사람이 되면 좋겠지?"
"확실히 그렇죠."
"아가야, 행복하니?"
아저씨의 의미 가득 찬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눈물이 넘쳐버린 뒤였다.
그 눈물이 지나온 길을 향한 눈물이었는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눈물이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난 그때 지금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행복하게.
그래서 난 눈물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행복해요."라고.
남자 친구와 다툼이 있던 날이었다. 그 날따라 집안이 어수선했고, 웬일로 나를 데리러 오지 않은 아저씨를 찾으러 방문을 열었을 때는 짐을 싸고 있는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 뭐해요?"
"아가, 내 말 좀..."
"아뇨. 더 이상 저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세요."
"아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잠시 여행 가려고 했던 것뿐이란다."
"개소리... 개소리하지 마세요. 여행 가는데 짐을 왜 이렇게 많이 싸요? 진짜 개빡쳐."
나는 그렇게 말하곤 곧바로 집을 나갔고 가장 가까웠던 친구의 집에서 근 한 달간을 지내다 다시 돌아왔다.
아저씨는 나에게 그 어떤 연락으로 자신의 행동을 애써 설명하지 않았다.
난 아직도 아저씨가 나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한 달간의 방황을 끝내고 집에 돌아갔을 땐 그저, 온통 열린 서랍들과 옷을 넣다 만 캐리어, 그리고 아저씨와 둘이 누워자던 곳에서 뒹구는 술병들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에 들었다.
"사실, 너희 아버지 너와 나 사이에서 많이 힘들어했었어. 너랑 그렇게 되고 나서 나한테 곧 이별통보를 했지."
"... 아저씨가 잘못했어요. 아줌마 때문이야."
"희수야. 그때 그건 잠시만 떠나 있자고 나한테도 애정을 좀 달라고 그 사람에게 갈구했었어. 내가 우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잘 울던 사람이라 어쩔 수가 없었나 봐. 확실한 건 네 아버지에게는 우리 둘 다 소중했어. 사랑했어. 하지만 네가 내 존재보다 더 컸어, 그 사람에겐. 나 만날 때에도 네 걱정에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던 사람이었어. 네 전화가 오면 바로 받고 널 데리러 가는 날에는 무조건 그 시간을 비워두던 사람이었다. 우리 둘 얘기보다 네 얘기를 서로 한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아."
이름도 모르는 아줌마는 그렇게 말을 하곤 내 손에 10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쥐어줬다. 내 얼굴이 아줌마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내가 지금 이것밖에 없는데... 일단 연락처 좀 주라."
집에 가는 길에서야 얼굴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흐를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흘러버렸다.
아저씨에게 아줌마는 나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에 문자가 왔다.
'계좌 좀 찍어줘. 그리고 이번 주 주말에 나랑 놀이공원에 가자. 현수 씨가 그러더라. 너 놀이공원 가고 싶어 했다고. 엄마는 돼줄 수 없어도 언니 노릇은 해줄게. 현수 씨 돌아올 때까지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아저씨와 깊은 대화를 나눈 건 단 한 번이었다. 난 아저씨의 말을 들어줄 생각도 듣고 싶지도 않았었다. 잘 여물지 않은 나의 치기 때문에 아저씨는 자신의 얘기를 한 번도 나에게 해줄 수 없었다.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못 했다. 너무 사랑했지만, 너무나 당연한 존재로 자리 잡아가서 익숙해졌다. 아마 난 사랑을 잘 몰랐나 보다. 그 사람의 사랑이 너무 커서 내가 아저씨를 사랑한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나 보다.
지금 아저씨를 만나면, 고마웠다고 사랑한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때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행복하시냐고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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